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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잘 지내지만, 사월안부 2022. 5. 7. 16:45
3월부터 정체 모를 어정쩡한 기미가 스믈스믈 올라오다가, 4월이 되면 그 실체가 불안이었으며 어째서 불안이었는지 전모를 확인하는 것.
어김없이 벌어지고 마는 일을 징크스라고 부른다면 이건 내 사월 징크스가 맞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바쁘게 일상을 보내는 편이어서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중순을 넘기는 시점에 아, 그러고 보니 또 사월이네. 한다.
작년은 어땠더라. 재작년은 어땠지, 또 그 전은…. 징크스의 성립을 부정하기 위해 한 해 한 해 곱씹어 보는 사이를 갖다가, 사월에 시간에 또 졌다고 분해한다.
그래서, 남들은 다 쉬어가는 제주가 이렇게 공사다망하고 다사다난했던 것을 의아해하지 않았다. 딱히 억울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제주인데.. 같은 생각도 없다.
이번에는 확실히 분하지 않았다. 이런 사월을 보내고 나면 분명해진다. 여전히 확실한 건 없어도, 내가 분명해진다. 여기까지 온 바에 될 때까지 할 거고 어떻게든 될 거다. 아무리 힘들고 죄다 안 될 것 같아도, 이 시기를 최선을 다해 보내고 나면 흔들리지 않는 나와 우리가 생기는 걸 이제는 기억해야겠다.
그러니 이번에도 잔인한 사월이지만 너를 미워하지는 않을래.
단단해지는 너와 나와 우리 - 어려운 사이 사이를 피하지 않고 찬찬히 긍정한다. 조금씩 더 능숙해진다.이러니 저러니 해도 배경이 아름답고 재밌었다. 유채꽃과 배추꽃이 비슷하다는 건 책에서 봐서 알고 있었는데, 무꽃도 비슷하다는 건 제주에서 알게 됐다. 예쁜 꽃밭이다가 꽃이 지면 저렇게 밑둥에 무가 보이면서 충격을 준다. 아니, 무였다고…?
아기자기하게 예쁜 종달리. 3주차가 되자 제법 로컬처럼 보다 넓은 주변을 버스 타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새로운 골목길을 걸으며 구석구석을 기억해두게 된다. 폭풍같은 2주를 보내고 나니 아무래도 쉼이 필요했던 주말. 날씨가 도와줘서 소풍이 아주 유쾌했다.
제주에는 인테리어가 좋은 공간들이 많은데 돌아다니다 보면 어딘가 비슷한 식상함이 있다. 그 중에서도 빛을 발하는 몇몇 곳들은 재방문을 했다. 여기는 개성있는 소품들이 하나 하나 소중하게 모은 티가 났는데, 그배치가 다 조화롭고 수집의 주체가 오래 산 집처럼 자연스럽고 실용적으로 이곳 저곳 배치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조명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저 그림을 보라.
아무리 예뻐도 맛 없으면 다시 안 오는데, 당근스프와 샐러드가 정말… 요샌 혼자 먹으면 맛 없고 귀찮다고 뱉었던 말을 크게 취소하기로 한다.
제주는 개와 고양이들이 왜인지 더더 정겹다. 조금 더 관종이고 조금 더 여유로운 건, 너가 아니라 나인가?
여행을 떠나 사람들의 예쁜 사진들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독일과 영국에서 유독 거리의 사람들을 많이 찍었던 기억이 나면서 나의 여행과 어림과 무모함이 그리워졌다.
밑둥에 살짝 보이던 그 무들을 며칠 지나지 않아 이렇게 일제히 뽑아 후숙시키는 듯하다. 날이 더 흐리면 아포칼립스의 분위기가 아주 물씬해진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일조하는 이 나무는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표지판에 손잡은 사람과 자전거가 다함께 있으니 정겹고 귀여워.
종종 사람들의 뒷모습이나 옆모습을 담아주고 에어드랍으로 사진을 보내주곤 하는데, 이건 좋아할지 아닐지 애매해서 내 사진첩에만 남았다.
이런 시골의 풍경들을 계속해서 마주치며 돌아다니다 보니 작가님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독특한 정서가 있다고 느낀 건 내가 작품에 너무 들어가 있어서인지 이 동네가 진짜로 그래서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파도는 없었지만 이대로 주말을 보내기가 아쉬워서 중문으로 달려갔는데, 우연히 정다운 이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다 좀 가라는 부사수의 선물이 도착해서 이걸 사용하러 가야겠다 싶었던 것도 사실 중문행의 큰 결정요인.
그러고는 나의 헌팅 사진을 받은 작가님이 진짜로 온다고 해서 공항으로 마중가기.
도착하자마자 로케이션을 진행한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지만 그게 더 작품적으로는(?) 좋았다고 이야기하며.
전주영화제 1N년차 나피셜 - 전주의 어떤 가맥집보다 맛있는 황태에 감탄하며, 제주맥주의 발전을 확일할 수 있는 거멍에일을 곁들인다.
빡센 일정에 조금 힘이 들어서 휴식타임을 제안. 이상한 사람처럼 찍어달라고 부탁해서 받은 사진.
나는 사무실 작가님은 카페에서 일하고 작업하는 오전을 보내고는 오후에 만나 회의하고 돌아다니는 루틴. 저마다 다른 타이밍의 작업과 파트너를 번갈아 3주째 진행하는 것이 빡세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모두 좋은 시간이었다. 모두와 한번씩 더 오고 싶다.
다들 내가 조련사 같다고 하고, 기숙학원 입실하는 거 같다고도 했지만 함께 추억을 한 자락 쌓아서 보따리에 잘 쟁인 기분이다. 제주에서 서울 오는 비행기에서 바쁜 일정이나 긴 여행에 너덜해졌다기보다는 배가 부른 느낌이었던 건…. 아 아닌가 이건 너무 많이 먹어선가?
이렇게나 고져스한 멸치튀김이 있는 밥집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줄거야 -
마무리하는 줄 알았지? 아니지롱. 막판이 되어서 파도를 딱 이틀 만났는데, 파도를 타는 즐거움을 아주 오랜만에 맥시멈으로 느꼈다. 작년에는 한번도 이런 순간이 없었어서 나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좌절감 같은 것을 느꼈었는데. 그런 감정은 섣불리 괜히 느끼지 말자. 바다는 역시 행복이야. 사랑이야.모자들을 많이 샀다. 하나는 부사수 선물이지만, 네 개 나란히 두니까 예뻐서 괜히 찰칵.
막판에 물욕 폭발.
맘에 들어서 자랑 남겨두기. 마지막 평일은 연차를 쓰고 호텔로 입실했다.
연차를 썼지만 미팅하러 표선. 일할 거면서 왜 연차를 썼냐면
한달살이하러 제주로 넘어온 부모님께 회사에서 제공하는 리조트 혜택을 드리기 위하여. 때마침 엄마 생일이어서 당근케이크와 함께 웰커밍파티.
보드를 제자리에 돌려두고, 한달 간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마무리 아쉬워서 갑자기 프리츠한센 팝업. 눈동자 모양의 화분을 사고 싶었지만, 저 화분이 어울리는 인테리어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눈에만 담아보기.
가장 미감이 좋았던 카페는 이 곳.
이 나이 먹고도 죽지 않은 뻔뻔함에 혀를 차며 (혹은 내두르며?) 셀피를 남겨둔다. 놀기도 잘 놀고 일도 잘 하는 사기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서울 도착 후 2.5일 동안 우선적으로 진행해야하는 일들을 빽빽히 모아 정리하고 정신차려보니 백상 시상식에 도착해 있었다.
영광의 부피를 학습하고 있다. 상 같은 것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던 나는 틀렸다. 뭐라 정의하기 힘든 이 영광의 에너지를 나의 파트너들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탐내고 있는 나의 뒷모습. 각 부문의 사람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도.. 뭐라고 쓰기는 부끄럽지만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의 보상은 확실히 받은 것 같다. 전달받은 모든 축하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이렇게 영광과 함께 본격 오월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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